그 날 아침, 이순의 처소에서 방정리를 하고 있던 옥정이는,
우연히 문갑위에 놓여있던 단오선을 발견하고는, 반가운
기색으로 이순의 단오선을 집어 들었다.
그 동안 깜박 잊고 있었던 단오선이였지만, 이순이 아직까지도
그 단오선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옥정이는
무척이나 기쁘게 생각 되었다.
그리고 단오선을 펼쳐보던 옥정이는, 이내 연상되듯 떠오르는
기억에, 그대로 입가에 미소가 걸려왔다.
그것은 이순이 처음으로 부용정에 들어서던 날 생긴 일이었다.
단오날을 기하여, 단오선 만드는 작업이 한창 이였던 시기에,
이순은 동평군을 따라, 부용정을 찾아들게 되었다.
얼마 후, 동평군과 함께 단오선 만들기에 동참을 하게 된 이순은,
풀칠하기가 힘들었던지, 그대로 체념을 해버린듯, 손을 내려
놓았다.
그리고 이미 단오선을 만들어서, 춤사위를 펼쳐 보이는 동평군을,
부러운 듯이 바라 보고 있었다.
그렇게 풀이 죽어있던 이순에게, 옥정이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말을 여쭈었고, 마침내는 이순의 단오선 만드는 작업을 도와
주게 되었다.
얼마 후, 옥정이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단오선을 완성하게 된
이순은, 무척이나 흡족하다는 듯이, 자신의 단오선을 펼쳐
보였다.
그런 이순의 흐뭇해 하는 모습에, 겨우나마 자리를 벗어나게 된
옥정이는 잠시의 쉴틈도 없이, 또 다시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양반가의 환갑 잔치에 들어갈 모시 적삼을, 서둘러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얼마 후, 안채 베틀실에서 모시 천감들을 골라 낸 옥정이는 수선
방으로 옮겨가던 도중, 그만 누군가와 맞닥뜨리고 말았다.
그 반동으로 안고있었던 모시천감들은, 허망없이 바닥으로
널부러지고 말았다.
난감해진 옥정이는 주변을 둘러볼 겨를 없이, 서둘러 모시
천감들을 주워담기에 바빴다.
그때, 누군가의 손이 재빠르게 움직이더니, 쏟아진 모시들을
주워서, 불쑥 옥정이 앞으로 건네왔다.
순간, 옥정이와 눈이 마주친 이순은, 무척이나 당황한 낮빛으로,
얼굴까지 발그레져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모시마져 옥정이에게 건네주며, 겨우나마 입을
열었다.
“아………………이거 미안하게 되었소이다. 그게………………
부용정 안을 구경하려다, 그만, 길을 헤매었던지, 이곳까지
들어와 버렸소.”
“아…………네, 그러셨군요……………”
옥정이는 이순의 그 말에, 잠시 갸우뚱해보이더니, 챙겨든 모시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서야, 이순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었다.
이순은 여전히 당황한 기색으로, 옥정이의 정황을 살피는 듯
하더니, 다시 한번 가벼운 고개 인사를 끝으로, 그곳에서 멀어져
갔다.
옥정이는 그때, 왜 이순이 그 곳 베틀 작업실까지,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인지, 도저히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볼꺼리가 진열되어있는 부용정 가게 안에서, 베틀실에 들어오기
까지는, 몇 개의 문간을 거쳐야 만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길을 헤맨다고 하더라도, 일부러 들어온 것이 아니라면,
이곳까지 들어올 일은 만무했기 때문이다.
얼마 후, 옥정이는 동평군과 이순이 돌아 가고 나서야, 향이를
통해,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옥정이가 안채로 바쁘게 사라지고 나자, 옥정이를 찾고 있었던
이순은, 향이에게 옥정이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 왔다는 것이다.
“옥정 낭자에게 단오선에 대한 예우로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
겠는데………………옥정 낭자가 있는 곳을 알려준다면……………
내가 직접 인사를 건네고 싶소마는……………”
향이는 그 말을 건네오던 이순이, 겸연쩍은 듯이 빨개진 얼굴로,
무척이나 어렵사리 말을 건네 왔다며, 자그러지게 웃음을
터트렸다.
향이의 이야기를 들은 옥정이는, 베틀실 앞에서의 이순을 기억해
내고는, 작게 실웃음을 짓고 말았다.
어렵게 안채까지 들어선 이순은, 자신과 부딧치게 된 미안함
때문이였는지, 무척이나 당황해 했었다.
그리고 단오선에 대한 인사는 아랑곳 없이, 오히려 사과만 하고
돌아섰던 것이다.
옥정이는 다시 한번 단오선을 펼쳐 보며 그 날, 환하게 웃어
보였던 이순의 모습을 아스라이 떠올렸다.
자신이 완성시킨 단오선이 그토록 기뻤던 것인지……………………
너무나 기분좋은 듯, 단오선을 펼쳐보며, 흐뭇해 하던 이순의
그 모습이란……………………
어쩌면 그때부터 였었는지 모를 일이였다.
이순을 바라보며, 무언가 알수 없이 끌리기 시작했던 자신의
마음이………………
우연히 스치는 눈길에도, 너무나 아련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이순의 그 눈빛이……………옥정이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았다.
그 두근거림은 옥정이에게 있어, 단 한번도 느껴 본 적이 없었던
떨림이였다.
가슴 속으로 아스라히 밀려드는 그 알수 없는 설레임에, 옥정이는
한 동안 자신의 마음을 다잡을 수 없었다.
그렇게 스스럼없이 지나쳤던 이순의 모습들이, 지금에 와서는
옥정이의 일상에 작은 기쁨처럼 잠겨와, 어느 결에 미소를 짓게
하는 모든 이유가 되었다.
얼마 간 그런 생각에 잠져 있을 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그대로 방문이 열리면서 이순이 모습을 드러냈다.
옥정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순은 밝은 표정으로 옥정이에게
말을 건네왔다.
“마침 이곳에 있었구나. 그렇찮아도 그대에게 부탁할 일이
있었는데……………”
“무슨 일이신지요………………”
“집무실 내부에 정리 할 일이 있는데, 아무래도 그대의 손이
필요하겠다 싶구나. 도와줄 수 있겠느냐.”
얼마 후, 옥정이는 이순을 따라 집무실에 들어서게 되었고,
이순의 말에 따라, 책상위에 있는 서찰들과 문방사우들을 정리
하게 되었다.
한참을 정리를 해나가고 있는 와중, 책상 위에서 무언가를 써
내려 가고 있던 이순은, 넌지시 옥정이에게 말을 건네왔다.
“그동안 그대와 잠시나마 시간이 나면, 함께 산책이라도 갈 수
있을까 싶었는데, 최근에 여러가지 일이 생기는 바람에, 좀처럼
시간을 낼 수가 없었구나.”
“바쁘실텐데 산책이라뇨. 아무리 그렇다 하나, 관아의 정무가
먼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번 일만 정리가 끝나면, 어떻게든 시간이 될 듯 하니,
그 때를 기대해 보자꾸나.”
“하오면, 이번 마을에 산불 재해는 잘 마무리가 되신 것입니까.”
“민가 소실이 생각보단 크긴 했지만, 사상자가 크게 발생하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질 않느냐.”
“…………………………………”
“그리고 이번에도 명구가 큰 활약을 했단다. 고을에 젊은이들을
끌어 모아와서, 화재 진압을 하는데, 무척이나 많은 도움이
되었구나. 늘 때마다 신세를 지는 것 같아서, 뭔가 보상이라도
해야 할지…………아니면, 관아에 일자리를 하나 만들어 줘야
할지, 그 재량이 왠지 아쉬워서 말이다.”
“…………………………………”
“그런데 옥정아…………………”
“……………………………………”
“………………응?………………”
이순은 자신의 이야기에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말을
하다 말고, 옥정이가 있는 서고 쪽으로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옥정이가 서책을 정리하다 말고, 무슨 영문인지
한 쪽에서 고전을 해보였다.
이순은 그런 옥정이의 모습이 의아해 보이자, 하던 작업을
멈추고 그대로 옥정이 앞으로 다가섰다.
옥정이는 이순이 자신앞으로 다가오자, 무언가 난감한 표정으로
이순을 올려다 보았다.
이순의 이야기를 들으며 서고에 책들을 꽂아 넣던 옥정이는,
서고에 있는 작은 이음새에, 그만 댕기머리 몇가닥이 엉켜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에, 풀어보려고 애를 썼지만, 좀처럼 손이 닿치 않자, 혼자
고심에 잠기고 말았다.
그런 옥정이의 모습을 본 이순은, 작게 웃어 보이더니게,
그대로 옥정이 앞으로 다가섰다.
일순간 이순의 얼굴이 옥정이의 귓볼을 스치자, 옥정이는
그대로 얼굴이 발그레져 왔다.
그리고 가슴께에 손을 가져다 올리며, 애써 모르른 척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옥정이의 그런 모습에 작게 실웃음을 짓던 이순은, 잠시
이음새를 살펴 보더니, 이내 난감한 듯 말을 들려왔다.
“이거 왠지 단단히 걸려 버렸나 본데,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 될성 싶구나.”
“그럼 어떡하지요.”
“글쎄, 무언가 방책이 필요하긴 한데……………”
“………………?………………”
이순은 반쯤 홍조가 되버린 체, 저 홀로 고심에 잠긴 옥정이를
넌지시 바라 보았다.
그날 아침, 서둘러 동헌으로 나가야 했던 이순은, 좀처럼
옥정이와 마주 할 시간이 없었던 터였다.
그런 차에 뜻하지 않게 옥정이와 맞닥뜨리게 된 지금 이상황이,
이순은 사뭇 흥미로운 듯 설레여 왔다.
그리고 왠지 그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우며, 말을 건네왔다.
“오늘 아침에는 제대로 그대와 마주할 시간도 없었더니,
아무래도 이런 일이, 그냥 생긴 것은 아닌 것 같은데……………”
“…………………………………”
이순은 무언가 딴전을 피우는 듯한 어투로 옥정이을 바라보았고,
옥정이는 그제서야 이순의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생뚱맞다는
표정으로 이순을 새초롬하게 쳐다 보았다.
그런 옥정이의 표정에 한번 더 몰아가듯이, 이순은 작은
헛기침을 해 보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하는 수 없구만………………조금 있다가 관헌들이 이곳에
들어와서 집무를 시작 할텐데, 그대가 그렇게 나온다면야…………………”
이순이 그 말을 들려주며 그대로 자리에서 멀어지려 하자,
옥정이는 당황해하며, 그대로 이순을 붙잡을 수 밖에 없었다.
얼마 후, 이순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굳게 마음을 먹은
옥정이는 뽀르퉁한 표정으로 이순을 올려다 보았다.
지금 이순은, 기분좋게 두 눈을 감아내리고서는, 옥정이가
입맞춤을 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옥정이는, 조용히 그런 이순을 바라보다가, 돌연히 실웃음을
짓고 말았다.
어쩌면 관헌들이 아니라, 누가 온다 해도, 난감한 것은 자신
뿐만 아니라, 이순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런데도, 유유히 지금의 상황을 즐기려는 이순이, 무언가
얄미우면서도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왜인지………………
옥정이는 좀처럼 미소가 입가에서 떠날 줄 몰랐다.
그런 옥정이의 낌새를 뒤늦게 서야 알아차린 이순은, 무언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며, 미간마져 찌푸려 보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옥정이가 웃음을 멈추지 않자, 이순은 잠시
옥정이를 야려보더니, 이내 무언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대로 물러날 수 없다는 듯이, 불현듯 옥정이의 앞으로
바짝 다가 선 이순은, 그대로 옥정이를 서고 벽면에 밀어 부쳤다.
일 순간 당황해 하는 옥정이에게 이순은 오히려 여유롭게 웃음을
지으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거 아무래도 그대가 나에게 넘어 오질 않으니, 내가 그대에게
넘어 갈 수 밖에………………”
그 말과 동시에 이순은, 옥정이가 무어라 말도 꺼낼 겨를도 없이,
그대로 옥정이의 입술을 찾아 들었다.
갑작스러운 이순의 행동에, 옥정이는 어찌할바를 모른체, 이순을
밀어내려 했지만, 이순은 되려, 옥정이의 허리를 감싸고는,
한층 더 가깝게 부딧쳐 왔다.
이순의 재빠른 포섭에, 밀리고 말았던지, 이순의 가슴에 맞닿아
있던 옥정이의 손도, 마침내는 그대로 힘없이 풀려지고 말았다.
이에, 빈틈없이 부딧쳐 온 이순의 기습 키스에, 옥정이도
속절없이 이끌릴 수 밖에 없었다.
잠시 두 사람의 중압에 서고에 책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왔지만, 더 이상 두 사람은 그 소리조차 개의치 않았다.
그저 지금은 서로가 이끌리는 대로, 그렇게 서로에게 닿아갈
뿐 이였다.
무언가 가슴 속에서 올라오는 두근거림이, 하나 하나 귓속으로
전달되어지면, 그 미세한 떨림 속에 모든 신경과 감촉들이
휘말려 드는 듯이, 옥정이는 점점 더 이순의 키스에 잠식되어
갔다.
그 떨림은, 부용정에서 느꼈던 그 두근거림과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옥정이의 가슴속을 물들여 왔다.
마치 부드러우면서도, 긴박스럽게 짜릿했고, 잠시 들이키려는
숨결마다 이순의 거침없는 호흡은, 잠시의 빈틈도 없이 너무나
극적으로 감겨 들었다.
그렇게 이순의 감촉이 스쳐간 자리에는, 너무나 아릿하고
달콤한 향기들이 깊고 진하게 그 흔적을 남겼다.
얼마 간 이순과의 달콤한 키스가 이어 지고서, 자신을 끌어
안은 이순의 이끌림에 그곳에서 떨어져 나와서야, 옥정이는
이미 댕기가 풀려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얄밉다는 듯이, 이순을 올려다 보았다.
이에 이순은 유쾌하다는 듯이 웃어 보이더니, 옥정이의
뽀르퉁한 얼굴을, 지극히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이거 애써 도와주었더니, 인사는 커녕 은인을 적대시
하는구나. 하지만 그대도, 지금은 내 마음과 동하지
않았더냐.”
이순의 그 말에 옥정이는 한층 더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올랐지만,
잠시 후 그 자리를 떠나는 이순을 바라보며, 옥정이는 말없이
수줍은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였다.
그 사이 옥사에 갇혀, 눈물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진이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 놓인 현실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좀처럼
믿겨지지 않는 듯, 한동안 가슴 앓이를 해야 했다.
그리고 그 동안의 일들을 돌이켜 보며, 이제 더 이상 그 모든
일에 대한 결과를 받아 들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에, 숙연히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사또였던 부친은 양반 벼슬은 말할 것도 없이, 그 동안 쌓아왔던
그 모든 공력마져 무너져 버렸고, 이제 곧 어디론가 먼 곳으로
유배를 떠나게 될 것이였다.
그런 부친의 뒤를 따라, 자신 또한 어느 지방 관아의 관노비로,
들어가게 될 운명이 되고 만 것이다.
더구나 자신의 모친 마져도 관아로 압송 되었다는 소식에, 진이는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이, 그대로 좌절에 부딧치고 만 것이다.
중죄인이라는 죄명으로 같은 옥사 내에서도 모친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되자, 진이는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달래야
했다.
지금 자신의 그런 모습을 모친이 보게 된다면, 또 한번의 불효를
보이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동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그동안의 일들을 돌이켜
보게 된 진이는, 결국 그 모든 일들이, 그 누구도 아닌 자신때문
이라는 자책감에, 시달리게 되었다.
덕분에 식음 전폐까지 하며 건강마져 상해가던 진이는, 이제
서서히 병색마져 짙어져 갔다.
그러던 중, 자신을 시중하던 봉이로부터, 뜻밖에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관아에서 지내게 된 옥정이가, 자신의 억울함을 이순에게 전해
줌으로써, 마침내는 형방을 추궁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였다.
하지만 진이는 이제 더 이상 기쁠것도, 반가워 할 여력도 생겨
나지 않았다.
이미 파국을 맞게 된 부친의 죄명으로, 자신이 관노비로 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은, 결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던 진이는, 무슨 영문인지
봉이를 시켜 옥정이를 한번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그 동안 자신이 벌여왔던 일에 대해, 어떻게든 옥정이에게
사과를 해야 겠다고 생각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날 저녁이 되어, 옥사에 들어 서게 된 옥정이는,
오랜만에 진이와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진이아가씨………………”
“………………………………………”
옥정이는 오랜만에 눈앞에서 접하게 된 진이의 모습에, 한 동안
할 말을 잃어야 했다.
얼마 전까지 보아왔던 양반댁 규수의 아리따운 모습은 어디로
사라지고, 지금 자신이 접하게 된 진이의 모습은, 참으로 믿겨
지지 않을 만큼, 초췌하고 쇠잔해 있었다.
“오랜만이네. 봉이에게서……………자네가 도와주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네.”
“아가씨………안색이 많이 좋아 보이질 않습니다. 어딘가
몸이라도 편찮으신지요.”
“그거야, 이런 옥사에서의 생활이란 것이, 다 그런것 아니
겠는가.”
“………………………………………”
“내 자네에게 참으로 말할 면목이 없네. 그동안 자네를 관아에서
몰아 낸 것도 모자라, 또 다시 자네를 궁지로 몰려고 했었네.
그랬는데……………그렇게 까지 심하게 자네를 괴롭혀 왔는데………………
자네는 이런 나를 위해…………………정녕, 이런 내가…………
밉지도 않았단 말인가.”
“………………………………………”
“………………………………………”
옥정이는 진이의 그 말에, 진이를 잠시 바라보다가, 시라린
표정으로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 뜨렸다.
무언가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한순간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
가자, 불현듯 마음마져 울컥해져 왔다.
그리고 깨물고 있던 입술을 겨우나마 떼어, 말을 건네었다.
“…………………미웠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싫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원망스러움 뒤에는……………애잔함 밖에 남질
않았습니다. 어쩌면 아가씨에게서, 제가 선비님을 바라 볼 때의
그 애처러움을 그대로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
마음은 같을 수 없을지 모르나, 그 애타는 아픔은………어쩌면
같을 테니깐요.”
“…………참으로……………미안하네. 정말 미안하게 되었네.
내가 갖추지 못한다고 해서, 자네의 그런 마음마져 짓밟은 것
같아, 정말……………면목이 없네.”
진이는 옥정이의 앞에서 처연히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눈물이
섞인 목소리로 겨우나마 말을 뱉어내고 있었다.
어느새 진이의 옷자락은 눈물로 하염없이 젖어들고 있었고,
서러운듯이 흐느껴 울던 진이는, 좀처럼 눈물을 거두지 못했다.
한 동안 진이의 그런 모습을 목전에서 바라보던 옥정이도,
무언가 또 다시 가슴으로 밀려오는 애잔함에, 입술을 지긋히
깨 물어야 했다.
그리고 얼마간 시간이 지나, 겨우나마 진정이 되어 보이자,
옥정이는 조심스럽게 진이에게 말을 건네었다.
“아가씨, 하온데 왜 선비님께는 사실대로 이야기를 하시지
않으신 것입니까. 아마 사실대로 말씀이라도 내 비추었다면,
선비님께서는 얼마든지 진이 아가씨의 이야기를 참작하셨을
텐데요.”
“그것이……………그럴수가 없었다네. 이미 부정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지금까지의 내 행실에 대해, 더 이상 어사또
께서는 나를 신뢰하시지 않는 걸 알았다네. 그리고 그렇게
된 원인도, 모다…………나의 잘못 때문이란 걸 알게 되었네.
이제와서 그 어떤 말이든 변명밖에 되지 않는 것을, 어찌
그 이상 무리를 할수 있겠는가.”
“하지만…………그건………………”
“아니, 아닐쎄. 이미 난 더 이상…………더 이상 양반가의
신분도, 사또의 여식으로서의 명분도 모두 다 내려놓아야 하네.
어차피 내 자리가 아니될 것을……………그리고 그 것을 진즉에
알았더라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하지 않았을 텐데……………
이제 와서야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
옥정이는 자신의 신분마져 내려 놓아야 한다며, 서글프게
이야기를 하는 진이를 바라보며, 조용히 시선을 떨어뜨릴 수
밖에 없었다.
이미 내동헌으로 도는 소문처럼, 이제 진이는 더 이상 양반의
규수도, 그렇다고 사또의 여식으로서도, 모든 입지가 흔들려
버리고 만 것이다.
그리고 한양에서의 처벌이 내려오면, 이제 더 이상 양반의
신분이 아닌, 천민으로서, 모든 가족들과 뿔뿔이 흩어져,
원치 않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 아픈 기억을, 누구보다 더 처절히 체감하고 있었던
옥정이는, 잠 시간 할 말을 잃고,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어쩌면 이미 자신이 겪었던 슬픈 기억때문에, 또 다시 누군가가
그런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을, 결코 가볍게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인지 모를 일이였다.
그래서 내동헌으로 떠 도는 그 소식들을 접했을때, 그렇게나
마음이 편지 않았던 것인지…………………
결코 이순에게 진이의 그런 사정을 전달하기까지, 너무나 침울
하고 무거워진 심정으로, 망설이게 되었던 옥정이였다.
자신은 이미 그런 아픈 경험이 있었기에…………………
그리고 천한 신분으로서의 세상바라기가, 그 얼마나 벗어나기
어려운 굴레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옥정이였다.
더구나 이순을 향한 진이의 애닳은 연심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옥정이로서는, 결코 남의 일이라고, 가볍게 지나칠 수
만은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런 안타까움에 묻혀, 말없이 상념에 빠져있던 옥정이에게,
진이는 조용히 말을 건네왔다.
“어쩌면, 나는………………내 운명이 무척이나 억울하고 불만
스러웠는지 모르겠네. 그래서……………내 타고 난 운명을,
벗어 날 수만 있다면, 어떻게 든 벗어나고 싶어서……………
그렇게 그 분에게 더, 절실해져 버렸는지 모르네. 그 분이라면,
내 운명을 바꿀 수도 있다는 집착에, 그만……………결국 모든
것을 다해, 은애하는 자네와는 달리, 나는……………오로지
나 자신 만을 위해서, 그 분이 필요했던 것이네…………………
그러니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 분의 신뢰와 사랑을 자네가
받을 수 밖에………………”
“………………………………”
“이제 자네도 그만, 자네의 그 불안한 마음을 내려 놓으시게.”
순간 옥정이는 자신에게 불안한 마음을 내려 놓으라는 진이의
말에,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진이를 바라 보았다.
진이는 그런 옥정이를 바라보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네. 처음 자네를 저잣 거리에서
보았을 때 부터……………자네가 자네의 신분 때문에 그 분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쉽사리 다가서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어쩌면, 처음부터 그런 자네를 뛰어 넘을 자신이
없었던 게야. 이미 자네가 관아에 넣어 달라고 부탁을 해
왔을때, 자네를 보는 내 마음은………………정말 작아질 수
밖에 없었다네. 그랬는데……………그렇게 강단있게 위험을
무릎쓰던 자네가, 내 말을 듣고 떠나려 했다는 것은………………
결국 자네 자신이 벗어날 수 없는 신분 때문이 아니고서야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
순간, 옥정이는 진이의 그 이야기에, 흔들리는 두 눈동자로
여지없이 동요되고 말았다.
결코 이순의 구애를 받으면서도, 자신이 천출이라는 두려움은,
끊임없이 옥정이를 엄습해 왔다.
더구나 기억을 되찾고 나서의 자신은, 더 이상 부딧쳐 볼 겨를도
없이, 그대로 마음을 내려놓고 말았던 것이다.
천출이라는 신분으로 인해, 처절하게 맛봐야 했던 냉혹한 현실
앞에, 가족들과의 이별도, 닿을 수 없는 이순과의 인연도,
옥정이에게는 그 무엇하나 쉽사리 뛰어 넘을 수 없는 장벽
이였다.
더구나 귀한 양반의 신분으로 자라나, 어두운 구석 하나 없는
이순이, 결코 그런 자신의 서러운 고통을 알리는 만무했다.
아무리 이순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속삭여 와도, 결국 그 사랑
마져도, 신분의 문 턱 에서는 냉엄한 현실만이 기다리고 있음을………………
그런 자신의 심경을 결코, 이순에게 밝힐 수 조차 없었던
옥정이였다.
옥정이의 얼굴이 어둡게 굳어져 가자, 진이는 잠시 정색을 해
보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나도 실은……………이렇게 타고난 내 운명 때문에, 내 마음
대로 살아가지 못한다는 것을…………어떻게 보면, 오히려
내가 어사또 나으리 보다는, 그런 자네의 그 입장을, 십분 이해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난 자네가 알고 있는 귀한 양반으로서,
결코 살아갈 수 없는………………운명이였으니깐……………………”
진이는 무언가 엄숙해져서는 잠시 숨을 들이키더니, 무슨 영문
에서인지,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를, 옥정이에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한창 철부지 어린 애기씨 였을 때의 진이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의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그 어떤 부족함도
없는, 양반가의 영애로서 자라날 수 있었다.
그리고 유난히 진이를 사랑해 아끼지 않았던 모친의 정성에,
진이도 그 사랑에 보답하기라도 하는 듯이, 일찍부터 경서를
손에 쥐게 되었다.
진이의 총명함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을
놀라게 할 만큼 천자문 습득은 말할 것도 없이, 동몽 선습에서
소학에 이르기까지, 순식간에 답습해 나갔다.
그런 진이의 모습에 진이의 양친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신주
단지 살피듯, 진이를 애지중지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마마를 앓게 된 어린 진이는,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고, 오랫동안 자리를 보전하고 말았다.
그런 진이를 걱정하던 모친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마침내 무속인을 불러다 굿을 해 보이며, 회복을 기원해야
했다.
그러던 와중, 무속인의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된 두 부부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진이가 앓고 있는 병은, 단순히 마마가 아닌, 조상신으로
인한 신병이라는 것이였다.
두 부부는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소리에, 노발 대발 하며
가차없이 무속인을 쫒아 내야 했다.
그러나 그 무속인의 말대로 아니나 다를까,
진이의 병세는 점점 더 심약해져 갔고, 그 모습을 본 모친은,
어느 날 그 무속인을 다시 찾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딸아이가 신병으로 앓다가 죽기라도
한다면, 차마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더구나 조상 신의 신병이라니, 결국 귀하게 자란 진이가
무속인의 운명을 타고 났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진이의 모친은, 그 무속인의 충고를 귀에 담을 수
밖에 없었다.
진이의 팔자를 바꾸기 위해, 수많은 방편 굿을 해야 했고,
그 결과 자신이 그 신내림을 대신 받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어린 진이가 어느 정도 건강이 회복이 되어지자, 그나마
액막이의 한 방편으로 진이가 평생 다리를 절도록, 어린 시절
때부터 신신 당부를 해 왔던 것이다.
결코 양반가 아녀자로써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였지만,
진이를 살리기 위해, 진이의 모친은 최선을 방법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또 또한, 진이의 장래를 위해, 무속인이 되어, 자신의
곁을 떠나는 부인을 그렇게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그 시기에 회양 고을의 사또로 부임을 받게 된
부친은, 어린 진이를 데리고 회양 고을로 옮겨오게 되었다.
사또부인 또한, 진이를 지켜보기 위해, 사또를 따라 회양 고을로
따라 와서는, 종종 먼 발치서 진이를 지켜보며, 사또와 인연을
이어오게 된 것이였다.
그러나 두 부부의 노력에도, 진이는 자신의 운명대로 결국,
그 신기를 벗어 내지는 못했다.
오히려 늘 걱정을 하는 사또를 염려해, 부친 앞에서 내색을
하지는 않았지만, 차차 주변 일들에 대한 예지력은 점점 더
돋아나고 있었다.
그 예지력에 대한 두려움에, 또 다시 불안에 휩싸였던 진이는,
절에서 스님에게 받아온 서책을 방편 삼아, 자신의 모든
판단을 그 서책에서 나온 글대로 받아 들이려 했었다.
결코 부모님의 희생을 생각해,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든 바꿔
내기 위해, 진이 또한 모든 노력을 쏟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정원을 둘러보고 있던 이순과 우연히 스쳐
지나게 된 진이는, 무언가 알 수 없는 운명의 힘에, 이끌리기
시작했다.
이순의 얼굴 빛이 여느 평범한 사람과 달리, 예사롭지 않다고
직감을 한 진이는, 무언가 알 수 없는 희망을 걸게 된 것이다.
그리고 조금씩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에, 이순을 향한 연심 마저
자리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런 이순의 곁에 다가가기 위해, 진이는 그 어떤 방법이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 이순의 사랑을 받고 있는 옥정이의 존재가, 결코
달갑지 만은 않았던 진이는, 어떻게든 옥정이를 이순의 곁에서
떠나 보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화재가 났던 저녁에, 옥정이를 윤부잣 댁으로
내 보내게 된 진이는, 그것으로 어떻게든 일이 잘 풀릴 줄
알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 일이, 이순과 옥정이의 인연을 더욱 더 돈독
하게 만들어 버린 결과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진이는 한참이나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이순은 끊임없이 옥정이를 찾아 헤매었고, 옥정이를 향한
이순의 사랑은, 더욱 더 애틋해 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좀처럼 자신의 원대로 일이 풀려지지 않자, 더욱 더 다급해진
진이는, 마침내 형방을 불러, 또 다른 계획을 들려주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사또의 옛 과거를 조사하던 조사원으로부터,
사또 가족의 비밀을 옅듣게 된 형방은, 오히려 진이에게 겁박을
하고 나섰다.
오랫동안 사또에게 쌓였던 감정이 많았던 형방은, 사또에 대한
불만과 더불어, 이미 입지가 흔들려버린 사또에 대해,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리고 진이로부터 옥정이의 이야기를 건네 받게 된 형방은,
무속인으로 살아가는 진이의 모친을 빌미로, 오히려 댓가를
요구해 온 것이다.
진이는 형방의 그 말에 격분을 하며, 그대로 형방을 되돌려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오랜 간 자신의 가슴속에 사무쳤던 모친에 대한 서러움이,
형방의 겁박에 그만, 울분으로 터져버리고 만 것이다.
타고난 운명을 거슬릴 수는 없었던 것인지, 결국 그 어떤
몸부림에도, 진이의 뜻대로 풀리지 않았고, 오히려 집안의
가세는 갈수록 흔들리고 말았다.
그리고 형방의 작당으로 궁지에 몰리게 된 진이는, 이제
더 이상 그 어떤 저항도 할 것 없이 묵묵히, 이순의 처벌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말없이 진이의 이야기를 듣게 된 옥정이는, 한동안 놀라움과
안타까움으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렇게 시선을 바닥에 떨어뜨리며, 침울하게 굳어버린 옥정이의
모습에, 진이는 오히려 작은 미소 마져 지어 보였다.
그리고 옥정이를 달래는 듯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아버님께서는 평소에 나에게 벼슬 아치로써, 어찌 나랏님의
어명을 받들지 않고, 어긋난 길을 가겠느냐고 늘 말씀을 들려
주셨지만………결국에는 나의 아버님조차 그렇치를 못하셨네.
오직 내 앞에서만 그런 근엄한 모습을 보여 오셨던 거지. 그런
모든 인과응보의 결과인지 모르겠네. 나 또한 자네를 나으리
에게서 떨어뜨리려 했던 잘못된 사욕심이, 결국 이런 결과를
낳게 되었으니 말이네. 과연 그 어떤 유혹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사람은, 오직 자네 뿐이였네. 그래서…………………
그래서 그런 자네의 고운 심성을 나으리 께서도 아신 걸께야.
물질과 사욕에 물들여 지지 않는 그 심성을…………결국 나는
자네처럼 그렇치 못했기에, 그런 자네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모르겠네.”
“……………………………”
“인간이란 어리석어서, 늘 옮고 그름을 판단하기 보다는,
그렇치 못한 어리석음에 빠져 버리고 만다는 것이지. 모두가
어두운 밤하늘에 타오른 화려한 불꽃 만을 쫒아 가려 하지만,
그 어둠 속에는 구덩이도 있고, 물 고랑도 있다는 사실을 망각
한 체, 그져 뛰어들기에만 바쁘지. 그것을……………나도
이제서야 터득하게 된듯 하네. 내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내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자네 같은 사람을
궁지에 몰아가며, 어리석게 굴었던 탓에………………결국은
이런 댓가가 따른 것 아니겠는가.”
“………아가씨………………”
“어쩌면 정말 절실해야 했던 것은………………운명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보다, 옮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아는 현명함이었을
지도 모르네……………이제서야, 그런 위치가 보여 지다니………………
이렇게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서야 말일쎄…………돌이켜보면,
너무나 안타까울 뿐이지만…………그래도 죄를 지은 사람에게
형벌이 따름은, 당연한 결과이고 순리인 것이야……………어찌
되었든, 이것이 내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따라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허나 자네는, 분명히 나와
다를 것이네.”
“…………………………”
“자네 눈에는 갑작스럽게 이런 말을 하는 내가,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어쩌면 자네의 고운 심성이,
내 마음도 움직였는지 모르겠네. 그래서, 내가 내 어린 시절
이야기를 자네에게 들려주게 된 것인지도………………자네는
나와 분명 다르네. 나으리 께서는 그런 자네를 결코, 떨어
뜨리지 않으실 걸세. 그러니 자네 만은 그렇게 자신의 운명에
물러서지 말라고, 신신 당부하고 싶었네. 그리고 자네는 분명…………
잘 극복해 나갈 것이야…………………”
“……………………………”
진이는 옥정이를 향해, 서글픔에 젖은 눈빛으로 잔잔한 웃음
마져 지어 보였다.
그런 진이의 모습에 옥정이는, 어쩐지 아리는 듯한 통증을
맛보아야 했다.
어찌보면, 오히려 위로를 해야 할 사람은 자신일지 몰랐다.
그런 평범하지 못한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슬픈 얼굴을
감추고, 감내 해 왔을 진이를 생각하니, 이내 옥정이도 알 수
없는 착찹함에 빠져들었다.
자신이 닿을 수 없는 신분의 벽으로, 그 모든 것을 잃고, 오랜간
괴로움을 감내 해 왔다면, 진이는 자신의 운명의 벽을 두고,
너무나 외로운 싸움을 부딧끼며 몸부림 쳐왔던 것이다.
한때는 너무나 원망스럽기 짝이 없었고,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마음 마져 들었던 진이 였었다.
그런데 지금 옥정이는, 자신과 다른 장벽에 또 달리 외롭게
견뎌왔을 진이 또한, 참으로 가련하고 불쌍한 처지라고
생각되었다.
그 누구도 불행한 삶을 살고 싶어서, 살아가는 이는 없을
것이였다.
그 어떤 이도 자신이 원치 않는 삶을 살고 싶어서, 그 모든
고통을 감내하는 이는 없을 것이였다.
그럼에도 그렇게 처음부터 정해진 운명이라는 것은, 너무나
잔혹하고 서글플 뿐이였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 또한 얼마나 감내하며
견뎌 왔던가.
스승님의 뒤를 이어, 부용정을 운영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양반가의 괄시와 천대를 받아 가면서까지………………………
결코 굽히지 않고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어머니와
소식이 끊긴 오라버니를 만나,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작은
소망 때문이였는데…………………
아무리 몸부림쳐도, 어머님은 천출이라는 신분 때문에, 조사석
대감 댁에서 벗어나기 힘들었고, 노잣돈을 대가면서도 찾아
보는 오라버니는, 여지껏 오리무중에 소식조차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백방으로 노력을 해도, 한번 정해진 천한 신분으로 태워
난 이는, 결코 그 껍데기를 벗어 낼 수도, 그리고 주위에서의
인정조차 받아낼 수도 없다는 것을………………
옥정이는 매일같이 체감하며 살아 왔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옥정이는 자신이 격어야 했던 그 불행의 재연을,
진이가 겪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너무나 안쓰러움에,
아무런 말조차 꺼낼 수가 없었다.
옥정이의 아프게 젖어 드는 눈동자에, 진이도 처연해진 모습
으로 말을 건네왔다.
“왜 그리도 슬프게 나를 보는 것인가. 자네가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나는……………”
“……………………………”
“나는………어떻게 되겠지………………이런 운명을 갖추고
태워 난 인생도, 결국에는………………어디로든 흘러가게 될
테니깐………………”
진이는 눈물이 차올라, 잠시 끊었던 말을 다시 이어내며, 겨우
나마 자신의 서글픈 운명을 받아 들여가고 있었다.
그런 진이의 힘없이 늘여지는 그 마지막 말이…………………
옥정이의 가슴에는 너무나 서글픈 여운으로 스며 들었다.
차라리, 자신이 그런 슬픔을 몰랐더라면, 이렇게 마음이
안타깝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자신을 괴롭혔던 양반가의 한 무리라 생각하고, 그대로
지나쳐 버렸을텐데………………
차라리, 아무것도 모른 체, 서러우면 서러운 대로 살아 왔더라면,
이다지 아프게 받아 들이지도 않았을 것을……………………
어렸을 적, 그 모든 시련을 맞닥뜨리며, 그 시절의 기억마저 지워
버릴 만큼, 아픈 상처를 간직했었던 자신이였기에……………………
지금, 옥정이는 진이의 처연한 현실 앞에, 여지없이 동요되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후, 그 곳을 빠져나온 옥정이는, 여전히 침울해진
기분으로, 한 동안 자신의 마음을 다잡을 수 없었다.
무언가 그 시절의 서럽고 암울한 덩어리들이, 이제 껏 억눌러
왔던 가슴 한 켠을 들썩이며, 분출되더니, 마침내는 옥정이의
마음 속, 고통의 불씨가 지펴오르기 시작했다.
그런 심정으로 겨우나마 자신의 처소에 들어선 옥정이는, 문득
그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이순을 보자마자, 불현듯
알 수 없는 눈물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순은 무언가 흐뭇한 마음으로, 옥정이를 기다리고 있던 차에,
때 마침 그 곳에 모습을 드러낸 옥정이에게 환하게 웃으며 다가
서려다가, 그만 그대로 경직되고 말았다.
무슨 영문인지 옥정이는 너무나 괴로운 얼굴로, 하염없이
눈물을 떨어뜨리며 서럽게 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순은 망설일 것도 없이, 성급히 옥정이에게 다가가야 했다.
옥정이는 자신 앞으로 다가 온 이순을 올려다 보더니 이내,
그대로 이순의 가슴에 파고들며, 서럽게 울음을 토해내고
말았다.
너무나 서럽게 눈물을 터트리며, 자신의 품속에 파고드는
옥정이를 보며, 이순도 얼떨결에 놀란 마음으로, 옥정이를
끌어 안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레, 이토록 서럽게 눈물을 쏟아내는
것인지, 이순으로서는 도저히 그 영문을 알 턱이 없었다.
그리고 그저, 그 어떤 말도 건네지 못하고, 한동안 옥정이를
다독 거리며, 울음이 그치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옥정이는 겨우나마 눈물이 잦아 들었고, 알수없이 초조해진
이순은, 몇차례나 마른 입술을 적셔가며, 옥정이의 안색을
살펴야 했다.
그럼에도 옥정이는, 한참 동안이나 아무런 말도 없이, 이순의
품에 안겨 있을 뿐이였다.
그러던 중, 잠시 옥정이가 몸을 떨고 있다는 느낌에, 이순은
다급히 옥정이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한차례 울음을 터트리고 난 옥정이는 잠시 기운을 소실 했던지,
이순에게 몸을 기댄 체, 그대로 축 늘어나 보였고, 체온마져
뜨겁게 열이 올라 있었다.
이순은 재빨리 옥정이를 안아 들고, 방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별단이가 가져온 물수건을 자신이 챙겨가며, 한 동안
옥정이의 곁을 지켜야 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레, 이토록 서럽게 울음을 터트렸던
것인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옥정이의 서러운 눈물에,
이순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듯이 진정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눈을 감고 누워버린 옥정이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바싹 말라온 입술을 몇 차례나 깨물었는지 몰랐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 때, 관아의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던 이순은, 옥정이의 간호를
별단이에게 맡기며, 걱정스런 마음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날 밤, 겨우나마 자리에서 일어난 옥정이는, 이순이 신신
당부를 하며, 자리를 나섰다는 별단이의 이야기에,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한 때는 무척이나 얄밉고도, 원망스러웠던 진이 아가씨였다.
누구에게나, 사연없는 사람은 없을테니, 그저 모르는 척
지나쳐 버릴 수도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진이의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사정과 앞으로의 험난한
일들을 생각하니, 왠지 어렸을 적, 자신의 아픈 기억들까지
겹쳐지면서, 옥정이는, 그대로 있기가 무척이나 괴로웠다.
그리고 한 참을 침울하게 앉아 있다가, 마침내는 이순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이순에게 이런 사정을 이야기 한다면, 조금이라도 선처될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옥정이는 상의라도 해
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얼마 후, 이순의 정무가 끝났을 시간에 맞춰, 이순의 처소로
발걸음을 옮기게 된 옥정이는, 때마침 마당으로 들어서는
이순과 마주치게 되었다.
이순은 그렇치 않아도, 옥정이에게 가볼 생각에, 서둘러 자신의
처소에 들렸던 차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자신의 처소 마당에서 옥정이가 기다리고 있자,
놀란 표정으로 옥정이를 바라보았다.
“옥정아………………이제 괜찮은 것이냐.”
“선비님…………놀래켜 드려서, 송구합니다.”
“아니………그것보다는 옥정아, 이제 네 몸은 괜찮은 것이냐.”
이순은 그대로 옥정이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올리며, 다시
한번 옥정이의 안색을 살폈다.
“이제 괜찮습니다. 오히려 선비님께 걱정을 끼친것 같아서……………”
“아니다. 아니야, 그것보다는 그대에게 무슨 일이 있는 줄
알고, 깜짝 놀랐지 않느냐. 그런데……………”
“……………………………”
이순은 너무나 담담하고 차분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옥정이가, 이제는 의아스러울 정도였다.
그리고, 옥정이가 무언가 중요한 일로,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을,
겨우나마 알아 차렸다.
이순은 옥정이의 표정을 살피며, 무언가 쉽지 않는 이야기를
꺼내 보일 것 같다는 긴장감에, 지긋히 옥정이를 바라보았다.
‘설마……………또 다시 자신을 떠나겠다는 그런 엄청난 소리는……………
아니야, 아닐 것이야. 하지만,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 하니………………
무언가 옥정이가 저렇게 처연하게 나를 쳐다 보다니…………………
이거 갈수록 초조해서 못견디겠군.’
이순은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어야 했다.
“그래…………그대가 나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선비님……………실은 여쭙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그래………어서 말해 보아라.”
“실은, 진이 아가씨의 일이온데, 어떻게…………선처해 주실
수는 없는지요?”
“……………!!………………”
순간 이순은, 두 눈이 커지며, 깜짝 놀란듯이 옥정이를 쳐다
보았다.
대체 어찌된 일인지, 왜 옥정이가 이토록 진이에 대해서, 걱정을
해 오는 것인지, 더구나 진이는, 옥정이에게 해선 안될 일까지
저질렀질 않았던가.
감히 바보가 아니면, 그 누가 그런 생각을 할 것인가.
그런데 지금, 옥정이는 너무나 어처구니 없게도, 진이를 선처해
줄 수 없는지에 대해, 물어오고 있는 것이다.
순간, 이순은 한층 더 마음이 당황스러워졌다.
지금 옥정이가 그렇게 서럽게 울었던 이유가, 진이 낭자의 일
때문이란 말인가,
이순은 일 순간 머리 속으로 수 많은 생각이 겹쳐지면서,
옥정이가 대체 왜 이러는지, 그져 그 모든 일들이 혼란스러울
뿐이였다.
“선비님, 사실은……………진이 아가씨께는 너무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십니다. 하온데, 그 사정이……………………”
“피치못할 사정이라니………………”
이순은 옥정이가 말하는 그 사정이, 황수 보살이 진이 낭자의
모친이란 사실을 두고, 말하는 것이라 생각되어, 더 이상 들을
것도 없이,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네가 무엇을 두고 말을 하는지 안 들어도 안다. 하지만 그 일을
두고, 진이 낭자를 선처해 달라는 네 생각에는, 나로서는
도저히 동조할 수 가 없구나.”
“선비님, 알고 계신다면서요…………그렇다면 진이 아가씨의
처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해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옥정아, 비록 진이 낭자의 일이 안됐다고는 하나,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는 없지 않느냐. 그리고 이 일은……………
그대가 가볍게 꺼낼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구나.”
“선비님, 하오나……………알고 보면, 진이 아가씨께서도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도 모르질 않습니까. 정말이지,
그 당사자의 입장이 아니고 서는, 그 고통은 아무도 헤아릴
수는 없으니깐요……………”
“옥정아 대체 네가, 왜 이렇게 진이 낭자에 대해서 염려를 해
오는 것인지 알 수야 없다만, 정해진 국법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니라. 누구를 막론하고 이 나라에 살아가고 있는 백성들
이라면, 모다 하나 같이 지키고 누리기 위해 규율된 법인데,
감히 어찌 네가, 나라의 법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것이며,
그리고 쉽게 죄인을 선처 해 달라는 말을 할 수 있단 말이냐!”
“……………………………”
“그리고 진이 낭자의 경우는, 개인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이미
전관 사또의 죄질이 엄중하기에, 나라의 정해진 국법에 따라,
그 일가족 마져도, 처분에 따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선비님, 하오나, 아무리 나랏님께서 정하신 법이라고 하오나,
그 정해진 법으로 인해, 사람의 목숨과 운명마져 좌우 될 수
밖에 없다면, 그건 너무나 가혹한 처사라 생각됩니다. 결국
나랏님께서도 이 나라의 백성들을 위해, 그 법을 정하셨질
않습니까. 하온데, 백성들의 위에 군림하는 법은 있어야 하고,
법 아래, 백성들의 사정이 있어서는 안된다 하시면, 그 법은
결국, 백성들의 고통 조차 헤아리지 못하고, 그져 나랏님이
정하셨기 때문에 따르고 지켜야 하는, 법이 될 뿐이질
않습니까.”
옥정이의 이야기를 들어가던 이순은, 점점 더 미간이 구겨
지더니, 무언가 답답하고 안타깝다는 듯이, 옥정이를 쳐다
보았다.
결코 그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이 나라를 이끌기 위해 정해진
법일진데, 지금 나라 법에 대해서 언급을 해 오는 옥정이는,
너무나 엄중한 일을, 쉽게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순의 불편해지는 심정에도, 옥정이는 여전히 이순을
애타게 바라보며, 이순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튼 오늘 저녁, 그대의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하겠다.
그리고 더 이상, 그대가 진이 낭자를 옹호하는 말을 듣고
있기가, 무척이나 거북하구나. 나라의 법을 진이 낭자 한
사람을 위해서, 그렇게 쉽게 어긋낼 수 있을 것 같으면, 누가
국법에 의한 판결을 따를 것이며, 받아 들이겠느냐. 그 어떤
일든지 호불호는 어느 곳에나 있을 수 있는 법,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그어질 수 있어야, 모든 백성들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벼슬을 지닌 양반이나,
그렇치 않는 상민이라도 그 규율을 따라야 하는 것이, 이 나라
모든 백성들의 당연한 의무인 것이다. 또 한 그 흐름에 누구
할 것 없이, 따라 올 수 있어야, 이 나라 조정에서도, 백성들을
두루 두루 보살피기가 수월치 않겠느냐. 그러니, 이제 더 이상
그 일에 대해서는, 그대가 마음을 단념 했으면 좋겠구나.”
“……………………………”
옥정이는 너무나 단호하게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버리는 이순의
냉정함에, 잠시 떨려오는 손에 힘을 실으며, 남아있는 체력으로
최대한 버텨내야 했다.
무언가 지금 눈 앞에서 바라보게 된 이순은, 너무나 차갑고 냉정
했으며, 마치 조그마한 인정조차 비어 낼 구석 없이, 자신의
이야기는, 전혀 받아 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 나라 모든 백성들이, 누구할 것 없이 그 법으로 인한
규율을 따라야 한다지만, 과연 그 잣대가 누구나에게나 똑같이
그어지는 것일까…………………
무언가 나라의 국법이 공평 무사해 보이는 것 같지만, 실상은
양반들과 백성들에게 똑같은 공평함이, 어디에 있을 것이라,
그리 단정을 지어 말을 하는 것인지…………………
무언가 불분명한 잣대로, 가차없이 결정을 내리 긋는 이순의
그 태도에, 옥정이는 더 이상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결국 양반은, 그 어디까지나 양반으로써의 입장과 그들을 위한
판결을 내릴 뿐, 역시나 그 바탕이 같을 수는 없었다.
옥정이는 이제, 더 이상 진이의 문제가 아니라, 나라 법에 대해,
마치 양반과 천민들의 모든 생활권이 온전히 지켜지는 듯이
정의를 내리는 이순의 말에, 동감이 되지 않았다.
결국 이순 마저도, 자신의 암울한 처지 일랑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일개 양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옥정이는 그 동안 가슴 속으로 눌러왔던 서러움에, 그대로
이순을 향해 말을 쏟아내야 했다.
“하오면 양반과 천민에 대한 규율도, 결국은 영원히 깰 수가
없는 것이겠군요……………그래서, 천출은 아무리 애를 써도,
양반을 하늘 우러러 보듯 올려다 봐야 하고, 결국은 그렇게
평생을 그런 업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겠군요.”
“옥정아……………갑자기 그 무슨………………”
옥정이는 이내, 자신의 가슴으로 올라오는 서러움의 눈물이
하나 가득 차여오기 시작했다.
결국 한번 타고난 신분은,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것이기에,
나라의 정해진 법대로, 천출은 영원히 그런 천대를 받아가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이 나라의 정해진 법인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런 운명으로 살아가는 자신 또한…………………
옥정이는 더 이상 버텨낼 수 없을 것 같은 몸을 끝까지 지탱해
가며, 눈 앞을 가려오는 눈물조차 훔쳐내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야
했다.
“정녕 모르시겠습니까. 선비님…………………아니, 도련님
이라고 불러 드려야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그 때 그 자리에,
나오시지 않으셨던 것입니까. 양반은 지켜야 할 약속을 깨도
되는 것이고………………천출인 저는, 결국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얼마나……………그 눈 속에서 추위에
떨며 기다렸었는데………………결국 그런 약속조차, 저의
미천한 신분 때문에 지키시지 않으셨을꺼면, 왜……왜 그렇게
저한테 손가락까지 걸며 약속을 하셨나요…………저는 그래도
도련님을 믿고, 오실 때까지………………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렸는데……………얼마나 춥고, 얼마나 마음이 서글펐는데………………”
겨우나마 말을 끝낸 옥정이는 쏟구치는 눈물을 더 이상 참아
내지 못하고, 그대로 눈물을 쏟아내며, 원망스러운 듯이
이순을 쳐다 보아야 했다.
그 동안 단 한번도 내색하지 않고, 그저 소리 없이 눌러 내렸던
그 모든 감정들이, 이제는 입 밖으로 터져 나오자, 더 이상
겉잡을 수 없는 서러움에, 자신 조차 주체 할 수 없게 되버린
것이다.
서글프게 눈물을 떨어뜨리는 옥정이 앞에, 이순은 얼굴이
하얗게 변하더니, 이내 동공마저 여지없이 흔들려왔다.
지금 옥정이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가, 대체 어찌 된 것인지………………
분명 옥정이는, 어린 시절 자신을 만났던 일들을, 기억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지금 옥정이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이, 자신을
어렸을 때 불렀던 도련님으로 불러온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 때 지키지 못했던 약속조차, 너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질 않는가.
게다가 지금, 자신의 신분 때문에,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라니………………
이건 또 어찌 된 소리인지………………
무언가 한참이나 자신을 오해하고 있는………………
그래서 일까.
옥정이는 지금 너무나 원망스러운 듯이 자신을 바라보며,
서럽게 울고 있는 것이다.
이순은 그런 옥정이의 모습을 눈앞에 접하면서도, 선뜻 그 어떤
말을 해야 할지, 혼돈에 빠져 들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을 너무나 아픈 눈으로 쳐다보며, 눈물을 떨어
뜨리던 옥정이는, 마침내 자신의 뜻을 알겠다는 듯이, 인사를
해 보이더니, 그대로 뒤 돌아 서고 말았다.
이순은 일 순간 다급하게 옥정이를 잡으려, 손을 뻗어 냈지만,
너무나 허무하게 빈 허공 만을 휘젖고 말았다.
무언가 어두운 장막이 갑작스럽게 자신의 눈앞을 가려 버렸고,
그 장막 속에 이순은 점점 더 깊게 파묻히는 기분에 휩싸여
왔다.
결국 울면서 떠나가는 옥정이를 잡지도 못했다.
아니라고 있는 그대로, 말을 들려주지도 못했다.
그리고 자신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며, 서글프게 우는 옥정이를………………
그대로 보내 버리고 말았다.
(이미지사진은 옥갤에서 옮겨왔어요. 문제가 될시 삭제하겠으니 말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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